생각 숲 편지 175호 : 구부러진 길
HIT 517 / 정은실 / 2015-01-14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 시인의 <구부러진 길>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반칠환 시인은 ‘남보다 빨리 가려는 직선의 길에서 만난 것은 오직 속도와 상처가 아니었는가.’라고 하며 ‘구부러진 길에 대한 향수’를 말합니다. 이 시에 대하여 도종환 시인이 말한 아래 글을 읽어보면 그 뜻이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구부러진 길은 천천히 가야 하는 길입니다. 구부러진 길은 꽃과 사람을 만나며 가는 길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직선의 길이 아닙니다. 산도 넘고 사람 사는 마을도 지나서 가는 길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사람도 쉬운 길로 혼자서만 가는 사람이 있고 구부러진 길을 택해 가족과 함께 이웃과 함께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대는 지금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요.
작년 어느 토요일, ‘오렌지 연필’이라는 공간에서, 눈빛이 맑은 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더 나은 기업,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진정한 성장이 무엇인가, 영성이 무엇인가에 질문도 서로에게 던졌습니다. 경쾌하면서도 진지한 자리였습니다.
이 시를 읽으니 새삼 그 날의 대화가 다시 떠오릅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품고 가는 삶,’ ‘함께 가는 삶’임을 생각합니다. 좀 늦어도 괜찮다, 구불구불 음미하며 걸어가는 길이 곧 삶이다, 구부러진 길이 나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어떤 길 위에 서 있는지, 무엇을 품고 가야 하는지,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 구부러진 길이 나에게 질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