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숲 편지 167호 : 세월호 100일을 보내며
HIT 357 / 정은실 / 2014-07-25
요즘 물건 이름, 사람 이름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이런 정신으로 강의는 어떻게 하나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깜빡깜빡합니다. 해가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집니다. 며칠 전에는 세월호 참사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고등학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서야 ‘단원고’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조카들 이름도 가끔 잊어버리는 정신이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단원고’라는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 어찌 그리 미안하던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어제로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100일이 지났습니다. 배 한 척이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아깝고 아까운 수백의 목숨이 가슴이 녹아내리는 가족들의 눈앞에서 가라앉았고, 그들이 살아 피워내어야 했을 꿈과 미래가 가라앉았고,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가라앉았고, 나 하나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던 일상의 안전이 가라앉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에서 2014년 봄의 화사함과 희망이 가라앉았습니다.
놀람, 안타까움, 슬픔, 불안, 두려움, 화, 분노, 미안함...... 온갖 감정이 뒤섞인 가운데 느껴지는 혼란 속에서 100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세월호 관련 기사 하나에, 사진 한 장에 눈물이 흐릅니다. 어젯밤처럼 천둥 번개 아래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예전에는 빗소리 들으며 떠올리지 않았던 깊은 바다의 숨막힘이 떠오르고, 나보다 수만 배 더 아픈 가슴으로 그 바다를 떠올리며 아플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앞을 지나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무리를 볼 때마다 젊음에 대한 예찬대신 애잔함을 느낍니다.
마지막까지 두려움에 떨었을 어린 영혼들이 지금 평온하기를 다시 한 번 기도합니다. 더 약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버린 고귀한 영혼들의 희생에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슬픔에 허물어지지 않고, 그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오늘도 투쟁하고 있는 단원고 학생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묵묵한 봉사자의 모습으로, 멈추지 않고 진실을 찾는 방송인의 모습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돕기 위해 한겨레신문 1면에 매일 희생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화백과 자식에게 보내는 부모의 편지를 싣고 있는 기자의 모습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세월호의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기억시키고 위무하는 전시회 기획자의 모습으로,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나누며 함께 눈물 흘리는 치유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당신들의 모습으로 인하여 이 사회의 붕괴된 믿음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누구 한 명 무엇 하나 돕지 못했지만, 심지어 내 가벼운 슬픔이 유족의 큰 슬픔에 누가 될까 미안해서 세월호와 관련된 글 한 편 쓰지도 못했지만, 매일 수시로 눈물이 쏟아졌던 지난 봄날의 내 다짐을 기억합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세월호라는 배의 이름과 단원고라는 학교의 이름을 잊을지라도, 내가 앞으로 그 어떤 직업과 역할을 갖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의 자리에서 내 양심에 비추어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나와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내 양심이 나의 사욕으로 흐려지지 않고, 더욱 빛을 지향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이 아픔을 통해 세상의 어두움이 정화되고 빛이 드러나는 과정에 한 작은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