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nite You & Your People 제72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HIT 1184 / 정은실 / 2008-11-09
어제 오늘 짧은 주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주말을 놓치면 가을을 보지 못할까 싶어서 집을 비울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조금 무리해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가을을 보러 떠났던 여행에서 이미 저만큼 오고 있는 겨울까지 마중하고 돌아왔습니다.
추수가 이미 끝난 논은 텅 비어 있었지만, 김장을 기다리는 배추와 무들이 아직 밭에 가득 남아 있었습니다. 산수유가 새빨갛게 나무에서 익어가고 붉은 고추들이 바닥에 누워 따가운 햇살에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수수하고 청초한 가을꽃들이 시골집 정원과 들녘에 가득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한 뼘씩 열려가고 있었습니다. 11월의 산과 들에는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 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답니다. 그 재미있는 말을 들여다보다가 인생의 11월은 어떤 때일까를 문득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84세까지 산다고 치면, 인생의 11월은 70세에서 77세쯤의 시기이겠군요. 어떤 분은 그 나이에 따뜻한 햇볕 아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목표라고 하던데, 나는 그때에도 아직도 경험하고 싶은 삶의 과제를 안고 사람을 만나며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83세에 타계하신, 대하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 선생은 자신의 유고시집에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쓰셨습니다. 아마도 인생의 12월에 쓰신 것 같은 그 구절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분이 인생의 11월까지 미처 버리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해 전, ‘집착 버리기’ 체험을 하셨던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 수련 과정에 참석하셨던 그 분은 어느 날 상상 속에서 독약 한 잔을 앞에 두고 스스로 자기 생을 버리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삶의 집착들을 다 버린 후에 약을 마시는 것이 과제였는데 그 분은 그날 마지막까지 그 약을 마시지 못했답니다. ‘다른 것은 다 버렸는데, 아내마저 버렸는데, 하나 있는 딸자식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내가 만약 지금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아직 그럴 수 없다’라고 완강히 나를 붙잡을 것이 무엇인가 떠올려봅니다. 아직 다 주지 못한 사랑, 구하지 못한 용서,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감사,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시간, ...... 이런, 나를 붙잡는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삶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삶을 치열하고 정직하게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한 대작가 박경리 선생도 많은 삶의 아픔을 경험했고 25년에 걸쳐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하소설을 완성해낸 분입니다. 그 분도 인생의 11월이 다할 때까지 자신이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하고 싶은 것을 치열하고 정직하게 경험했기에 인생의 12월에 그리 노래하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흔 둘. 이제 인생의 6월을 마무리하고 7월에 접어들려고 하는 나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인생의 12월에 이르게 될 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치열하고 정직하게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같은 그 말을 나도 하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훌훌 낙엽비가 내립니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은, 한 해의 의미 깊은 마무리를 앞두고 내 온 마음을 모아보기에도 참 좋은 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