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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ite You & Your People 제66호: 내가 살다 죽으면 함께 사라질 그것

HIT 1245 / 정은실 / 2008-09-29

 

가을은 가을인가 봅니다. 읽어야할 자료들도 책들도 많은데 시집에 손이 갑니다. 며칠 전 샀던 ‘밥’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집어 들었더니 이희중이 쓴 ‘숨결’이라는 시에 마음이 갑니다.

오래전 할머니 돌아가신 후
내가 아는 으뜸 된장 맛도 지상에서 사라졌다
한 사람이 죽는 일은 꽃이 지듯 숨이 뚝 지는 것만 아니고
목구멍을 드나들던 숨, 곧 목숨만 끊어지는 것만 아니고
그의 숨결이 닿은 모든 것이, 그의 손때가 묻은 모든 것이,
그의 평생 닦고 쌓아온 지혜와 수완이
적막해진다는 것, 정처 없어진다는 것,
그대가 죽으면,
그대의 둥글고 매끄러운 글씨가 사라지고
그대가 끓이던 라면 면발의 불가사의한 쫄깃함도 사라지고
그대가 던지던 농의 절대적 썰렁함도 사라지고
그대가 은밀히 자랑하던 방중술도 사라지고
그리고 그대가 아끼던 재떨이나 만년필은 유품이 되고
또 돌보던 화초나 애완동물은 여생이 고달파질 터이니
장차 어머니 돌아가시면
내가 아는 으뜸 김치 맛도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시를 읽다보니 벌써 여러 해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님은 음식솜씨가 참 좋으셨습니다. 특히 김치를 잘 담그셨고 어떤 찌개나 국을 끓여도 맛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김치가 참 맛있어요. 어떻게 이 맛이 나지요?’라고 여쭈어보면 그냥 어려워말고 담그면 된다고만 하셨습니다. 혹시 무슨 비결이 있나 싶어 담그실 때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지만 정말 비결은 없었습니다. 찌개나 국을 끓으실 때에도 내가 옆에서 보기에는 별 특별한 재료도 넣지 않고 끓이시는 것 같은 데 늘 기분 좋은 맛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국물 맛이 나냐고 여쭈어보면 ‘어려워 말고 그냥 끓여봐라. 하다 보면 쉬워진다.’고만 하셨습니다. 세 따님들이 모두 어머님을 닮아 음식들을 잘하시지만 그래도 어머님이 담그신 것 같은 김치 맛과 국물 맛을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니 어머님 음식솜씨의 비결을 알 듯 합니다. 여섯 남매를 키우며 사셨던 어머님은 그 많은 자식들을 각각 도시락 두 개씩을 싸서 학교 보내며 키우느라 정신없이 바빴을 때가 제일 좋은 때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창 크는 아이들 때문에 금방 김치를 담그고도 돌아서면 또 김치를 담가야 했다고 하셨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밥상을 차리다 보면 여러 명이 먹을 수 있는 찌개나 국이 꼭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유난히 사랑이 많으셨던 어머님의 음식솜씨는 자식들에게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 여러 해를 지병으로 고생을 하시면서도 자식들이 찾아뵈러 가면 손수 밥상 차리기를 계속 하셨던 것 같습니다. 김치를 먹을 때면, 찌개를 끓일 때면 늘 어머님 모습이 따뜻하게 떠오릅니다. 그것은 단지 음식이 아니라 이제 곁에 계시지 않은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내 두 아이들은 나중에 나를 어떨 때 무엇과 함께 떠올릴까. 그 생각의 끝을 따라,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희승 시인이 시에서 말하듯, 내가 살다 죽으면 함께 사라질 그것들 가운데, 살아 있는 누군가가 아쉬워할 정도로 소중한 것이 있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기여하고 싶어 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또 한 번의 씨 뿌림을 준비하며 붉게 노랗게 익어가는 나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기에 참 좋은 계절, 지금은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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