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nite You & Your People 제29호: 속리산 문장대에서
HIT 1469 / 정은실 / 2008-01-14
나는 미끄럽고 추운 눈 덮인 산을 사람들이 왜 오르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설산의 모습을 담은 멋진 사진도 많은데 일부러 힘들게 겨울 설산을 올라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니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별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내가 지난 일요일 아이젠을 부착하고 가족들과 속리산 문장대를 올랐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해마다 눈이 펑펑 내리고 난 후에 산을 올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등산화와 등산복도 제대로 준비해서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가까운 사람들과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 일정에 속리산 문장대 오르기가 있었습니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모임참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 병구완으로 신경을 써주지 못한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엔 가족들만 보내고 저는 그냥 산 아래에서 쉬면서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전날 밤에도 여러 날 입원 중이신 아버지 곁을 지키느라 잠을 설쳐서 온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겨울산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잖아.’라는 남편의 말이 없었다면 정말 산 아래 주차장에서 혼자 쉬고 싶었습니다.
산기슭에 도착해서 산을 한참 오를 때까지도 마음은 병원에 가있었습니다. 여행을 떠나온 나를 대신해서 꼬박 아버지 병실을 지켜야할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해서 무거운 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씩 산을 오르면서 점점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포근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속리산은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눈 내린 후에 내렸다는 비 때문에 햇살에 반짝이는 눈부신 얼음 꽃들이 온산에 가득했습니다. 어느 순간 나는 온전히 산 속에 있었습니다. 그저 설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설경 속에 내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문장대 마지막 지점에 올라서자 나는 감탄했습니다. 그곳에는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그 풍경보다 멋진 사진을 본 적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문장대에서 내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어떤 사진과도 달랐습니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내가 이제까지 한 발 한 발 딛고 올라오며 감탄했던 풍경들로 곳곳이 채색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요일 눈꽃과 얼음 꽃으로 신비로웠던 속리산을 오르며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높은 산을 멈추지 않고 오르는지. 그것은 그 지점에 올라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험과 풍경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득 내 삶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정도도 충분해.’하고 멈추었을 때 나는 딱 그만큼만 경험해왔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만약 피곤함을 핑계로 주차장에서 일행들을 기다렸다면 나는 그들이 전하는 감탄에도 불구하고 속리산의 아름다움을 내가 놓쳤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의 산들을 몇 개를 지나서 지금 어디에 있나 바라봅니다. 내가 걸어온 산들을 바라봅니다. 깊고 얕은 계곡과 높고 낮은 산들이 보입니다. 내가 오르려고 하는 산들을 바라봅니다. 어느 때인가 내가 저 먼 산에서 굽이굽이 넘어온 산들을 바라볼 때 나는 내 삶에 어떤 감탄을 하고 있을까요. 나는 그때 내가 ‘참 아름답구나, 내가 걸어온 길들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