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개발연구소 로고

Ignite You & Your People 제15호: 열네 살 밴드

HIT 1365 / 정은실 / 2007-10-07


오늘은 안양 중앙공원에서 열린 안양시 시민축제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해마다 가을 초입에 열리는 축제인데 올해 그 내용과 방식이 더 다채로워지고 시민참여 중심으로 바뀐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노인의 여러 가지 체력저하 현상들을 고글, 귀마개, 무거운 모래주머니 등을 끼고 경험해보기, 휠체어 타고 장애인 체험해보기, 가족들이 함께 알루미늄 호일이나 색깔 철사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보기 등의 참여방식 행사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직업적 관심으로 행사의 내용과 방식을 눈여겨보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 곳이 공연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오늘 가장 인상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양의 어느 중학교 2학년 여학생들로 구성된 밴드의 공연이었습니다. 사회자의 질문에는 수줍어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학생들이 공연이 시작되자 음악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어수선한 열린 공간에서 청중의 박수를 이끌어내는 보컬의 무대매너, 나름대로 신경 쓴 헤어스타일들, 며칠간을 고민해서 고른 것 같은 무대의상, 여릿여릿한 얼굴과 서투른 몸짓에도 감출 수 없이 나타나는 아티스트다운 기운이 눈을 돌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특히 그 다섯 아이들 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완전히 공연에 흠뻑 빠져서 관중들의 시선을 살피거나 수줍어하는 것도 없이 온 몸과 마음이 몰입된 두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다가 생각했습니다. 나는 열네 살 적에 저렇게 무엇인가에 주체적으로 깊게 몰입을 한 적이 있었던가.

내게 주어진 혹은 스스로 선택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서 무엇인가에 깊게 몰입하기 시작했던 것은 삼십대 중반을 지나면서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열심히 살았고 나름의 꿈과 계획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걷는 길을 걸으며 반듯한 삶을 살았을 뿐, 삼십대 중반까지도 내면의 욕구에 깊게 귀 기울이지는 못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며 그저 열심히 흘러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던 나를 보며, 열네 살 나이에 한국에서 ‘공부하기’라는 주류를 벗어나 하고 싶어 하는 일에 흠뻑 빠져있는 그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비록 그들이 이다음에 음악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미 저러한 용기와 열정을 가진 아이들은 삶의 다른 장면에서도 또 다른 열정을 발휘할 것이라는 믿음이 일었습니다.

그들을 보며 산수유가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산수유 같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직 겨울 같은 이른 봄에 피어하는 노란 산수유는 겨울에도 그 이른 봄의 열정을 떠올리게 하는 새빨간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대추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나무들이 이미 신록으로 반짝이기 시작하는 늦은 봄에야 죽은듯한 가지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하고, 또 문득 어느 날 핀 듯 만 듯 연둣빛 작은 꽃을 피우고 맺힌 듯 만 듯 열매를 맺었다가 가을에야 불그스레한 열매를 익혀내는 늦깎이 대추나무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산수유의 이른 열정을 사랑하지만, 대추나무의 느린 성장도 사랑합니다. 우리 많은 ‘나’들이 자기만의 색깔과 모양과 향기로 싹 틔우고 건강하게 열매 맺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을 우리가 여기에 오기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하고 떠나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공연장에서 만난 열네 살, 산수유 같은 아이들이 비주류가 살아가기 힘든 이 땅에서 세상의 잣대에 재단 당하지 않고 그 열정을 거름 삼아 아름답게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대추나무 같은 늦깎이들이 타인과 비교함 없이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시간을 따라 자신의 싹을 틔워 이 공간 속에서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름 비번
스팸방지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